휴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작성자
woonam
작성일
2023-02-24 03:06
조회
29
휴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예) 육군대장 김 재 창
2012. 9. 3
1. 문제의 제기: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0년 6월 중순,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불러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하고 있던, 반공포로를 모두 석방하라고 지시한다. 6월 18일 밤 수용소의 문이 열리자, 반공포로 대부분이 수용소를 탈출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 포로 교환문제는 정말 뜨거운 감자였다.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전쟁 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원래 소속되었던 나라로 송환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625 한국전에서의 반공포로는 이런 국제규약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북괴군이 불법남침으로 서울을 점령하고 나서, 길에 다니는 젊은이는 보이는 데로 잡아다가, 괴뢰군의 군복을 입혀 소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선에 보내었고, 이들이 전쟁터에서 포로가 된 경우, 아무도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대부분 반공포로가 된 것이다. (물론 북한에서 입대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송환을 반대하는 반공포로가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UN 군 사령부에서는, 포로의 송환은 인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포로의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해야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공산군 측 주장은 반공포로도 모두 북한으로 돌려 보내야한다는 주장이어서, 이 문제를 놓고 쌍방은 근 2년 동안 줄다리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1953년 봄부터, 교전 쌍방은 간신히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중립국 책임 하에 포로의 자유의사를 확인한다는 절충안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그 때에 교전 쌍방은 정말 수없이 많은 장애물을 넘어서 어렵게-어렵게, 일단 교전을 중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무렵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던 쌍방은 모두 지칠 만큼 지쳐있었다. 북괴군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주력을 거의 다 잃어버린 상태였고, 중공이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에도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에게 무기와 탄약을 공급해야했던 소련의 경우도, 경제적인 문제가 심각하게 부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Stalin 이 죽은 다음 소련의 새로운 권력구조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계속하는데 대한 내부적 부담이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UN 군의 주력을 제공하고 있었던 미국은 군사비를 대폭 증강하여 소련의 팽창정책에 대응하기위한 전비 태세를 보강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한반도에 주력을 묶어두는 것을, 세계전략 차원에서, 몹시 부담스러워했고, 전쟁이 길어지자 미국 내부에서도 부분적으로 염전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여, Eisenhower 대통령은 한국전을 조기에 종결 짖겠다는 정책을 선거 공약으로 제시해둔 상태였다.
영국의 경우 미국의 우방으로서 한국전에 참전하기는 했지만, Hong Kong 문제를 위시하여 중공과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할 때에 전쟁이 길어질수록 자국의 안보에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에 대하여 빨리 전쟁을 끝내달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께서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강대국들이, 겨우 만들어 놓은 합의에 찬물을 쏟아 부으면서, 정전회담 자체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모택동은 분통을 터트리면서 한국군에게 보복하라고 팽덕회, 전선 사령원에게 지시하였고, 영국의 처칠은 이승만정부를 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강력히 항의 하였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터져 나오는 불만을 참고 색이면서, 위기관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입장은 기왕에 전쟁이 일어나서 이미 국토는 잿더미가 되었고, 그렇게 수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이 기회에 분단의 문제를 종결지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참가하고 있던 강대국들의 견해는 달랐다. 한반도의 분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김일성의 괴뢰군이 낙동강 까지 내려갔다. 그 다음 UN 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청천강까지 올라갔다. 뒤늦게 참전한 중공군이 다시 한강을 건너서 평택선까지 남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는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얻어내지는 못하였다.
이 전쟁은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전쟁이 아니었다. 한 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군대를 파견하여 남의 나라의 전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편이 얼마만큼 전투력을 파견하느냐에 따라, 힘의 균형에 변화가 일어났고, 전선이 오르락내리락 했을 뿐, 남북한 당사자를 제외하면, 이 전쟁에서, 자기 나라 자신의 존망(存亡)을 결정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전쟁이 모두에게, 사생지지(死生之地) 가 되기는 했지만, 여느 전쟁처럼 존망지도 (存亡之道) 가 될 수는 없었고, 오히려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요, 정치는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라는 “전쟁과 정치를 동일시” 하는 논리가 더 설득력을 지니게 된 국제 분쟁이 된 것이다.
미국정부는 대통령 특사 Robertson 을 파견하여 이승만 정부와 긴 협상을 시작하였다. 이대통령께서 단독북진이라도 하겠다고 주장했던 것은 가능하면 이 기회에 분단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민족적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분단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분단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Arms or(and) Alliance 의 문제였다. 한. 미. 양국 정부는 정전후의 안전을 보장하기위해, 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문제와 한미 상호 방위조약체결을 약속한 후 이대통령은 그렇게 극렬하게 정전을 반대하던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게 된다. UN 참전국들은 서둘러 정전 협정을 마무리 한 후, 7월 27일 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가 되자, 전선에는 총성이 멎었다. 격전의 3년이 승자도 패자도 없이 일단 정전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 정전 체제가 거의 60년을 이어오고 있다.
오늘 우리는, 1953년 그때, 즉 60 년 전 문제를 다시 들추어내어 그 뿌리를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이 대통령께서 모험을 해 가면서 그렇게 격렬하게 정전을 반대했던 배경에는, 이 나라 미래의 안전을 보장하는 문제에 심각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 그의 고뇌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그 속에 오늘 우리나라 안보의 근본적이고도 핵심적인 문제들이 모두 다 담겨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문:
1. Buffer 의 나라
일반적으로 강대국사이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를, 국제정치학자들은, Buffer 라고 부른다. 완충지대의 나라라는 뜻이다. 19세기말 과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입지가 영락없이 그런 Buffer 의 나라였다.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이 Buffer 의 나라를 다루었던 방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독립을 보장해 주면서, 중립국으로 관리하는 방법이고, 둘째는 적절한 선으로 나누어 분할 통제하는 방법이고, 세 번째 방법은 강대국끼리 싸워서 이긴 나라가 독차지하는 방법이다. 결국 Buffer 의 입장에서는, 주변 강대국들 간의 거래에 따라, 이 세가지중 하나가, 그 나라의 운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 이승만 대통령이 겪은 Buffer 의 운명
사실 우리는 이 세 가지 운명을 다 겪어본 나라다. 청일전쟁은 일본과 중국이, 노일전쟁은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놓고 서로 먹으려고 싸웠던 전쟁이었다. 이들이 모두 한반도를 Buffer 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지정학적 특징들이 20세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왔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태동하고 있던 1950년대, 그때에도, 한 반도는 역시 Buffer 의 나라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이대통령의 첫 번째 고민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53년 8월 9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가서명을 한 후 이 대통령이 발표한 성명서에는 이 나라가 겪어왔던 Buffer 의 운명에 대한 그의 견해가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신이 1875. 3. 26. 이었으니,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5년, 그는 20세의 청년이었고, 노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30세,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었던 1945년, 그는 70세의 노인이었다.
일본, 소련(구 러시아), 그리고 중국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이웃이다.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주변 강대국들이 서로 먹으려고 각축전을 벌이던 시대를 살아오면서, 현실주의가 지배하는 국제관계에서, 힘의 논리가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를, 그리고 Buffer 의 나라가 겪어야만 했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는지를 누구보다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었고, 또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분이었다. 그 내용 중에 중요한 부분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 일본: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 중국이 체결한, 강화조약(하관조약) 제 1항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인정하며, 조선에서 청나라에 조공 헌상 전례는 영원히 패기 한다.” 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일본이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놓고 청나라와 전쟁을 해서 이긴 후 내 걸었던 명분이,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 임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가소롭게도, 그것은 마치 청 나라의 압제를 받던 조선을 일본이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1910년, 일본은 이 “완전한 독립국”이라던 조선을 송두리째 삼켜 버렸다. 강대국들이 Buffer 를 다루는 전형적인 행태라고 볼수 있다. 이 대통령께서는 그런 일본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일성 집단과 전쟁을 하면서도, “반공” 과 동시에 “반일”을 국시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군사전략 차원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양면작전이다. 물론 당시 일본은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김일성 집단과 싸우면서, 남쪽으로는 “반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뇌와 그 전략의 배경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 소련:
독일의 패망이 확실시되고 있던 1945년 봄, Roosevelt 는 Stalin 에게, 독일이 항복하는 대로, 태평양전역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되도록 피를 덜 흘리면서 최대한 빨리 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Stalin 이 이 제의를 수락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1905년 러일전쟁 이전에, 러시아가 극동에서 보유하고 있었던 모든 이권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Stalin 이 보장해 달라는 이권에는, 주로 만주철도와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여순, 대련항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빼앗긴 남부 사할린섬을 포함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은 그때 이미 만주에 들어와서 기지를 구축하고 있던 러시아와 한반도를 장악한 후 만주로 진출하려던 일본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일본에 대하여 한반도의 39도선 북쪽에 완충지대를 설치하자고 주장했고, 일본은 압록강 북쪽 만주 땅에 완충지대를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이런 외교적 마찰로 협상이 결렬되자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극동에서 물러났다. Stalin 의 속셈은 정확히 그 원한을 풀어야 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때에 Stalin 이 명시하지 않은 중요한 속셈이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러시아가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한반도에서의 이권이다. 1905년 당시 러시아의 외교관들이 39도선 이남은 일본의 영역이라고 인정했지만, 이제 일본이 망하는 마당에 Stalin 은 한반도 전체를 내다보게 된 것이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가 분단된 배경은 널리 알려져 있다. 45년, 8월 6일 첫 번째 핵폭탄이 일본에 떨어지자, Stalin 은 급히 군대를 동원하여 태평양 전역(戰域)에 투입하였다. 그는 주력을 만주에 투입하면서, 다른 통로를 이용하여 별도로 다른 부대를 한반도로 진출하게 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본토 방어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와 한반도에 배치된 전투력은 예상보다 훨씬 미약하였다. 따라서 소련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남하할 수 있었다.
당황한 미국 정부가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과 군사작전 구역을 나누자고 제의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Stalin 은 그 제의를 즉각 수용한다. 당시 그에게 38도선은 1904년에 러시아가 일본에 제의했던 39도선보다, 훨씬 남쪽이라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 놀라운 사건이 최근 영국학자들에 의해서 공개되고 있다. 당시 Stalin 이 일본영토였던 대마도를 한국에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입장으로는, 일본이 36년 동안이나 이 땅을 식민지로 통제하면서, (3. 1.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것처럼), “아 문화민족을 토매인우”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한 것도 뺏어 오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Stalin 이 나서서 대마도를 뺏어주겠다고 주장했으니, 얼른 듣기에는 자비로운 해방군이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보면, Stalin 의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의 판단으로는 일본이 물러간 후 어차피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통제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대마도는 일본을 위협하는 전진 기지로 유용하게 쓰게 될 것 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관계라 하지만, 소름끼치는 대목이다. 강대국들이 Buffer 를 다루는 전형적인 수법이기 때문이다.
Stalin 이 Roosevelt 에게 요구했던 조건 중에, 외몽고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때에 외몽고는 중국이 통제하고 있던 땅이었다. 그런데 Stalin 이 외몽고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얼른 듣기에는 몽고인들의 염원을 들어준 구세주 같은 주장이지만, 사실은 그 땅을 중국에서 때어 내어 소련이 갖겠다는 것이었다.
청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은 독립국”이라고 주장했던 것과, Stalin 이 극동으로 진출하면서, “몽고를 독립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대마도를 일본으로부터 뺏어서 조선에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꼭 같이 해방군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야수의 모습이었다고 볼 수 있다.
6.25 한국 전쟁은, 1905 년 이전에 구 러시아가 차지했던 이권을 회복하려고 극동에 나타난 Stalin 이, 욕심을 내어 한 반도 전체를 먹으려고 일으킨 전쟁이다. 패전 일본은 쫓겨 갔고, 미국은 전략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철수하였고, 신생 대한민국은 아직도 Buffer 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 육군대장 김 재 창
2012. 9. 3
1. 문제의 제기: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0년 6월 중순,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불러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하고 있던, 반공포로를 모두 석방하라고 지시한다. 6월 18일 밤 수용소의 문이 열리자, 반공포로 대부분이 수용소를 탈출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 포로 교환문제는 정말 뜨거운 감자였다.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전쟁 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원래 소속되었던 나라로 송환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625 한국전에서의 반공포로는 이런 국제규약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북괴군이 불법남침으로 서울을 점령하고 나서, 길에 다니는 젊은이는 보이는 데로 잡아다가, 괴뢰군의 군복을 입혀 소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선에 보내었고, 이들이 전쟁터에서 포로가 된 경우, 아무도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대부분 반공포로가 된 것이다. (물론 북한에서 입대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송환을 반대하는 반공포로가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UN 군 사령부에서는, 포로의 송환은 인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포로의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해야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공산군 측 주장은 반공포로도 모두 북한으로 돌려 보내야한다는 주장이어서, 이 문제를 놓고 쌍방은 근 2년 동안 줄다리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1953년 봄부터, 교전 쌍방은 간신히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중립국 책임 하에 포로의 자유의사를 확인한다는 절충안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그 때에 교전 쌍방은 정말 수없이 많은 장애물을 넘어서 어렵게-어렵게, 일단 교전을 중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무렵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던 쌍방은 모두 지칠 만큼 지쳐있었다. 북괴군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주력을 거의 다 잃어버린 상태였고, 중공이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에도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에게 무기와 탄약을 공급해야했던 소련의 경우도, 경제적인 문제가 심각하게 부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Stalin 이 죽은 다음 소련의 새로운 권력구조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계속하는데 대한 내부적 부담이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UN 군의 주력을 제공하고 있었던 미국은 군사비를 대폭 증강하여 소련의 팽창정책에 대응하기위한 전비 태세를 보강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한반도에 주력을 묶어두는 것을, 세계전략 차원에서, 몹시 부담스러워했고, 전쟁이 길어지자 미국 내부에서도 부분적으로 염전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여, Eisenhower 대통령은 한국전을 조기에 종결 짖겠다는 정책을 선거 공약으로 제시해둔 상태였다.
영국의 경우 미국의 우방으로서 한국전에 참전하기는 했지만, Hong Kong 문제를 위시하여 중공과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할 때에 전쟁이 길어질수록 자국의 안보에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에 대하여 빨리 전쟁을 끝내달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께서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강대국들이, 겨우 만들어 놓은 합의에 찬물을 쏟아 부으면서, 정전회담 자체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모택동은 분통을 터트리면서 한국군에게 보복하라고 팽덕회, 전선 사령원에게 지시하였고, 영국의 처칠은 이승만정부를 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강력히 항의 하였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터져 나오는 불만을 참고 색이면서, 위기관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입장은 기왕에 전쟁이 일어나서 이미 국토는 잿더미가 되었고, 그렇게 수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이 기회에 분단의 문제를 종결지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참가하고 있던 강대국들의 견해는 달랐다. 한반도의 분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김일성의 괴뢰군이 낙동강 까지 내려갔다. 그 다음 UN 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청천강까지 올라갔다. 뒤늦게 참전한 중공군이 다시 한강을 건너서 평택선까지 남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는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얻어내지는 못하였다.
이 전쟁은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전쟁이 아니었다. 한 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군대를 파견하여 남의 나라의 전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편이 얼마만큼 전투력을 파견하느냐에 따라, 힘의 균형에 변화가 일어났고, 전선이 오르락내리락 했을 뿐, 남북한 당사자를 제외하면, 이 전쟁에서, 자기 나라 자신의 존망(存亡)을 결정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전쟁이 모두에게, 사생지지(死生之地) 가 되기는 했지만, 여느 전쟁처럼 존망지도 (存亡之道) 가 될 수는 없었고, 오히려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요, 정치는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라는 “전쟁과 정치를 동일시” 하는 논리가 더 설득력을 지니게 된 국제 분쟁이 된 것이다.
미국정부는 대통령 특사 Robertson 을 파견하여 이승만 정부와 긴 협상을 시작하였다. 이대통령께서 단독북진이라도 하겠다고 주장했던 것은 가능하면 이 기회에 분단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민족적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분단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분단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Arms or(and) Alliance 의 문제였다. 한. 미. 양국 정부는 정전후의 안전을 보장하기위해, 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문제와 한미 상호 방위조약체결을 약속한 후 이대통령은 그렇게 극렬하게 정전을 반대하던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게 된다. UN 참전국들은 서둘러 정전 협정을 마무리 한 후, 7월 27일 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가 되자, 전선에는 총성이 멎었다. 격전의 3년이 승자도 패자도 없이 일단 정전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 정전 체제가 거의 60년을 이어오고 있다.
오늘 우리는, 1953년 그때, 즉 60 년 전 문제를 다시 들추어내어 그 뿌리를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이 대통령께서 모험을 해 가면서 그렇게 격렬하게 정전을 반대했던 배경에는, 이 나라 미래의 안전을 보장하는 문제에 심각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 그의 고뇌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그 속에 오늘 우리나라 안보의 근본적이고도 핵심적인 문제들이 모두 다 담겨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문:
1. Buffer 의 나라
일반적으로 강대국사이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를, 국제정치학자들은, Buffer 라고 부른다. 완충지대의 나라라는 뜻이다. 19세기말 과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입지가 영락없이 그런 Buffer 의 나라였다.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이 Buffer 의 나라를 다루었던 방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독립을 보장해 주면서, 중립국으로 관리하는 방법이고, 둘째는 적절한 선으로 나누어 분할 통제하는 방법이고, 세 번째 방법은 강대국끼리 싸워서 이긴 나라가 독차지하는 방법이다. 결국 Buffer 의 입장에서는, 주변 강대국들 간의 거래에 따라, 이 세가지중 하나가, 그 나라의 운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 이승만 대통령이 겪은 Buffer 의 운명
사실 우리는 이 세 가지 운명을 다 겪어본 나라다. 청일전쟁은 일본과 중국이, 노일전쟁은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놓고 서로 먹으려고 싸웠던 전쟁이었다. 이들이 모두 한반도를 Buffer 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지정학적 특징들이 20세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왔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태동하고 있던 1950년대, 그때에도, 한 반도는 역시 Buffer 의 나라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이대통령의 첫 번째 고민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53년 8월 9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가서명을 한 후 이 대통령이 발표한 성명서에는 이 나라가 겪어왔던 Buffer 의 운명에 대한 그의 견해가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신이 1875. 3. 26. 이었으니,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5년, 그는 20세의 청년이었고, 노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30세,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었던 1945년, 그는 70세의 노인이었다.
일본, 소련(구 러시아), 그리고 중국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이웃이다.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주변 강대국들이 서로 먹으려고 각축전을 벌이던 시대를 살아오면서, 현실주의가 지배하는 국제관계에서, 힘의 논리가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를, 그리고 Buffer 의 나라가 겪어야만 했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는지를 누구보다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었고, 또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분이었다. 그 내용 중에 중요한 부분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 일본: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 중국이 체결한, 강화조약(하관조약) 제 1항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인정하며, 조선에서 청나라에 조공 헌상 전례는 영원히 패기 한다.” 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일본이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놓고 청나라와 전쟁을 해서 이긴 후 내 걸었던 명분이,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 임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가소롭게도, 그것은 마치 청 나라의 압제를 받던 조선을 일본이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1910년, 일본은 이 “완전한 독립국”이라던 조선을 송두리째 삼켜 버렸다. 강대국들이 Buffer 를 다루는 전형적인 행태라고 볼수 있다. 이 대통령께서는 그런 일본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일성 집단과 전쟁을 하면서도, “반공” 과 동시에 “반일”을 국시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군사전략 차원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양면작전이다. 물론 당시 일본은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김일성 집단과 싸우면서, 남쪽으로는 “반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뇌와 그 전략의 배경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 소련:
독일의 패망이 확실시되고 있던 1945년 봄, Roosevelt 는 Stalin 에게, 독일이 항복하는 대로, 태평양전역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되도록 피를 덜 흘리면서 최대한 빨리 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Stalin 이 이 제의를 수락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1905년 러일전쟁 이전에, 러시아가 극동에서 보유하고 있었던 모든 이권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Stalin 이 보장해 달라는 이권에는, 주로 만주철도와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여순, 대련항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빼앗긴 남부 사할린섬을 포함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은 그때 이미 만주에 들어와서 기지를 구축하고 있던 러시아와 한반도를 장악한 후 만주로 진출하려던 일본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일본에 대하여 한반도의 39도선 북쪽에 완충지대를 설치하자고 주장했고, 일본은 압록강 북쪽 만주 땅에 완충지대를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이런 외교적 마찰로 협상이 결렬되자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극동에서 물러났다. Stalin 의 속셈은 정확히 그 원한을 풀어야 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때에 Stalin 이 명시하지 않은 중요한 속셈이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러시아가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한반도에서의 이권이다. 1905년 당시 러시아의 외교관들이 39도선 이남은 일본의 영역이라고 인정했지만, 이제 일본이 망하는 마당에 Stalin 은 한반도 전체를 내다보게 된 것이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가 분단된 배경은 널리 알려져 있다. 45년, 8월 6일 첫 번째 핵폭탄이 일본에 떨어지자, Stalin 은 급히 군대를 동원하여 태평양 전역(戰域)에 투입하였다. 그는 주력을 만주에 투입하면서, 다른 통로를 이용하여 별도로 다른 부대를 한반도로 진출하게 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본토 방어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와 한반도에 배치된 전투력은 예상보다 훨씬 미약하였다. 따라서 소련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남하할 수 있었다.
당황한 미국 정부가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과 군사작전 구역을 나누자고 제의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Stalin 은 그 제의를 즉각 수용한다. 당시 그에게 38도선은 1904년에 러시아가 일본에 제의했던 39도선보다, 훨씬 남쪽이라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 놀라운 사건이 최근 영국학자들에 의해서 공개되고 있다. 당시 Stalin 이 일본영토였던 대마도를 한국에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입장으로는, 일본이 36년 동안이나 이 땅을 식민지로 통제하면서, (3. 1.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것처럼), “아 문화민족을 토매인우”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한 것도 뺏어 오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Stalin 이 나서서 대마도를 뺏어주겠다고 주장했으니, 얼른 듣기에는 자비로운 해방군이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보면, Stalin 의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의 판단으로는 일본이 물러간 후 어차피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통제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대마도는 일본을 위협하는 전진 기지로 유용하게 쓰게 될 것 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관계라 하지만, 소름끼치는 대목이다. 강대국들이 Buffer 를 다루는 전형적인 수법이기 때문이다.
Stalin 이 Roosevelt 에게 요구했던 조건 중에, 외몽고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때에 외몽고는 중국이 통제하고 있던 땅이었다. 그런데 Stalin 이 외몽고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얼른 듣기에는 몽고인들의 염원을 들어준 구세주 같은 주장이지만, 사실은 그 땅을 중국에서 때어 내어 소련이 갖겠다는 것이었다.
청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은 독립국”이라고 주장했던 것과, Stalin 이 극동으로 진출하면서, “몽고를 독립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대마도를 일본으로부터 뺏어서 조선에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꼭 같이 해방군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야수의 모습이었다고 볼 수 있다.
6.25 한국 전쟁은, 1905 년 이전에 구 러시아가 차지했던 이권을 회복하려고 극동에 나타난 Stalin 이, 욕심을 내어 한 반도 전체를 먹으려고 일으킨 전쟁이다. 패전 일본은 쫓겨 갔고, 미국은 전략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철수하였고, 신생 대한민국은 아직도 Buffer 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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