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3

(45세) 서재필과 함께 찰스 토마스, 존 쉬로스 미 상원의원으로 하여금 한국독립승인 안을 미 의회에 상정케 함. 상원 본회의에서 아일랜드 독립지지안과 함께 상정되었으나 34:46으로 부결됨.

 

11.15

상해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직에 부임하기 위해 호놀룰루 항에서 비서 임병직과 함께 몰래 화물선에 오름. 일본이 30만 달러의 체포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에 중국인 시체를 넣은 관 속에 숨어 있었음.

 

12.5

상해에 도착하여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크로푸트 목사 집에서 기거.

 

12.28

상해 임시정부청사에서 초대대통령 취임식. 5개월간 집무했으나 독립운동가들의 노선 갈등으로 크게 시달림.

 

1921.5.29

(46세) 워싱턴 군축회의 개최 예정 소식이 들리자,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 때문에 불가피하게 떠난다는 ‘고별교서’를 발표하고 상해를 출발.

 

6.29

호놀룰루 도착. 민찬호 등과 함께 자신을 지지할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조직.

 

8.27

워싱턴 군비축소회의(태평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해 임정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워싱턴디시에 도착(부대사 서재필, 서기 정한경, 고문 프레데릭 돌프).

 

10.10~12.1

워싱턴군축회의 미국 대표단에게 ‘한국독립청원서’ 제출. 대한민국의 승인을 요청하는 법률고문 프레데릭 돌프의 글이「미국의회사록」에 수록됨.

 

1922.1.25

(47세) ‘군축회의에 드리는 한국의 호소’ 속편 발표.

 

3.22

이승만 지지자들이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으로 이름을 바꿈.

 

1923.6

(48세) 학생고국방문단(남학생 12명 여학생 8명)을 2개월간 한국에 파송, 전국 각지를 돌며 야구시합과 공연을 갖고 3,600 달러를 모금해 하와이로 돌아옴.

 

1924.1.23~
10.25

(49세) 미국본토 방문. 임영신으로부터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때 일본인의 만행 자료를 얻음. 로스앤젤레스에서 파나마운하를 거쳐 워싱턴 에 도착

 

11.23

‘대한인동지회’의 종신총재로 추대됨.

 

1925.3.11~
4.10

(50세) 상해 임시정부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에서 면직하고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발표. 그러나 이에 불복해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계속 운영.

 

1928.4.10

(53세) 구미위원부에서「재만동포옹호」팜플렛 발표

 

1929.10.5`~
1930.1.8
(54세)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 호놀룰루로 돌아 온 후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발간하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