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7.18

(35세)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그의 학위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 은 영세중립론’은 1912년에 프린스턴 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됨.

9.3

국권을 빼앗긴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뉴욕 항을 출발.

10.10

(35세) 귀국 (리버풀,런던,파리,베를린,모스크바,만주를 거처 서울역에 도착, 5년11개월 6일 만의 귀국).

1910.10-
1912.3.26

(35-37세) 서울 기독청년회(YMCA)의 한국인 총무와 청년학교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 전도 활동. 존 모트의 <신입학생 인도>를 번역해 출판. 37일 동안(1911.5.16 ~ 6.21)의 전국순회전도 여행 중에 개성에서 윤치호가 세운 한영서원(송도고등학교)에 들러 제2회전국기독학생 하령회(夏令會)에 참석.

1912.3.26 (37세) 다시 미국으로 망명(1년5개월의 한국 생활을 마감). ‘105인 사건’에 뒤 이은 체포 위협이 있자,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릴 ‘국제기독교 감리회 4년 총회’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도록 선교사들이 주선함으로써 체포를 면함.

5.1 일본, 캐나다, 미국의 시애틀을 거처 미네아폴리스의 감리교 총회에 참석.

6.19 은사인 우드로 윌슨(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을 뉴저지의 시거트 별장에서 만나 한국의 독립 지원을 호소(그 후 두 차례 더 만남). 윌슨의 추천서를 가지고 워싱턴 등지를 다니면 한국의 독립을 호소.

8.14 네브라스카의 헤스팅스에서 ‘소년병학교’를 운영하는 박용만을 만나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 한국인이 많은 하와이를 독립운동 기지로 삼기로 합의.

11.18 「워싱턴포스트」지에 인터뷰 기사 실림.

1913.2.3 (38세) 하와이에 정착.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

8 하와이 미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을 맡음. 한국어와 한문을 새로 가르치고 학교 이름도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바꿈.

9.20 월간「태평양잡지」창간(나중에 ‘태평양주보’로 제호를 바꿈).

1914.7.29 (39세) ‘한인여자(성경)학원’을 설립.

1915.5 (40세)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재정문제를 둘러싸고 박용만과 충돌. 박용만은 몇 년 뒤에 중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가 그의 행동을 오해한 한인에 의해 피살됨.

6 ‘한인중앙학원’을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독립시킴.

1917 (42세) 호놀룰루에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

10.29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 민족대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1918.7.29 (43세) 호놀룰루에 ‘신립교회’ 창설,

9 ‘한인여자(성경)학원’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 으로 바꿈.

12.1 정한경, 민찬호와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됨.

12.23 ‘신립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꿈.

1919.1.6 (44세)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주 본토를 향해 호놀룰루 출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안창호를, 필라델피아에서는 서재필, 장택상, 민규식 등을 만나 독립 추진 방략을 논의.

3.3 파리 평화회의에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이자, 정한경의 제의에 따라 장차 완전독립을 전제로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 
그러나 이것은 급진파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게 됨.

3.5 파리 행 여권 발급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미 국무부로부터 받음.

3.10 서재필로부터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음.

3.21 노령(러시아령) 임시정부에서 국무경(국무 및 외무총장)으로 추대됨(대통령 손병 희, 부통령 박영효).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5일에 알게 됨. 4.7 국무경 자격으로 UP통신과 회견.

4.11 상해임시의정원이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추대(이승만은 4월15일에 알게 됨).

4.12 하와이에서 독립선언식 거행.

4.14-16 서재필, 정한경과 함께 필라델피아 시내 ‘소극장’에서 한인대표자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개최를 개최하고 인디펜던스홀까지 행진. 대회에는 필라델피아 시장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참석.

4.23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국민대회를 열고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수립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이승만은 이 사실을 5월말에 알게 됨).

4.23 워싱턴디시에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 활동본부 설치.

6.14-27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 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 발송.

6.27 파리에서 외교활동중인 김규식 대표에게 정부훈령을 보냄.

7.4 국ㆍ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 발표

7.17 워싱턴디시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 설치.

8.15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젼긔(大韓獨立血戰記) 발간.

8.16 대한인국민회가 이승만의 집정관 총재 추대 축하식 거행.

8.25 워싱턴디시에 ‘구미위원부’를 열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임명함. 9월에 ‘임시정부 구미위원회’로 이름을 바꿈.

9.1 재정확보를 위해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임시정부 공채(公債) 발행.

9.6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으로 선출.

9.19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 함께 1주일동안 전체한인회의를 개최. 필라델피아시장 토마스 스미스, 상원의원 S. D 스펜서 등의 저명인사들이 참석. 그들의 연설문은「미국의회의사록」에 수록됨.

9.19 이승만의 고문 변호사 프레드 돌프의 한국독립 지지 논설이「미국의회의사록」 에 게재됨.

1919.10~
1920.6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 지지 호소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