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2-10 14:16
개혁의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996  
개혁의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
: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2012. 12. 3
 
 
1.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50대 이하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그리고 왜곡되거나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도 대표적인 이미지가 “보수, 수구, 친일, 반민주, 반민족” 같은 이미지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승만은 가장 진보적이며 개혁적이고 민주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지도자였다.
이승만은 청년시절부터 낡고 무능하고 부패한 봉건왕조를 타파하고 서구식 민주사회를 만들고자 투쟁했다. 다시 말하면,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으로부터 미국 중심의 해양문명권으로 역사적 전환을 하고자 했다.
이승만은 1875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의 조선사회는 어떠했는가? 조선왕조가 봉건적 전제군주제였던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조선은 해금정책을 통해 대외적으로 폐쇄고립정책을 폈다. 대원군은 외세배격 차원에서 천주교도들을 색출 집단적으로 학살했다. 전국의 유학자들은 중국의 성리학과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고 천주교와 서양문화를 배격하자는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동학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한국사회는 양반과 평민 및 천민으로 나누어진 철저한 신분사회였고 직업도 신분에 따라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철저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조선은 내우외환으로 혼란과 위기에 빠져 있었다. 즉 일본의 군사적 위협에 따른 강화도조약((1876), 군대반란인 임오군란(1882), 개화파 쿠데타인 갑신정변(1884), 영국의 거문도점령(1885), 동학란(1894-95), 동학란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군대 파견 요청(1894),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1894), 조선쟁탈을 둘러싼 청일전쟁(1894-95),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1895),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사건인 아관파천(1896-97), 러일전쟁(1904-1905) 등이 있다.
이승만은 청일전쟁이 끝날 즈음인 1895년 미국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기독교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그는 선교사들과 외국인 교사들을 통해 서구문물에 눈을 뜨게 되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면서 부모 몰래 상투를 자르고 선각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미국식 토론모임인 <협성회>를 결성하여 나라가 처한 위기와 극복방안에 대해 토론했다. 1898년 한글판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를 발간하고 주필이 되었으며, 3개월 후 최초 일간지인 <매일신문>으로 발전시켜 사장 겸 논술인이 되었다. 1899년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 총대위원으로 종로에서 부패·무능한 집권세력에 대한 비난과 입헌군주제 채택 등을 주장하다가 역모죄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학교를 열어 글을 가르치고 도서실을 만들고 한영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2. <독립정신>에 나타난 이승만의 개혁·개방사상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는 가운데 백성을 일깨워 나라의 독립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 <독립정신>을 집필했다. 안네의 일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열악한 감옥에서 몰래 쓴 <독립정신>이야말로 그보다 더 유명한 책이 아닐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에 이승만의 개혁사상이 잘 나타나 있고, 그의 일생은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도록 지속적으로 투쟁했다.
이 책에서 그는 조선을 폭풍을 만나 침몰하고 있는 배에 비유하며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국민 각자가 해야 할 역할을 논하고 있다. 그는 집권세력들이 오로지 권력유지를 위해 낡은 제도를 고집하며 백성들을 못 살게 하고 있다고 집권세력을 비난한다. 그리고 민주제도의 장점을 논하며 하루 속히 나라를 개방하고 개혁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백성들을 개화시키는 것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고 문명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 지름길이라 주장하고 있다.
<독립정신>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우리는 세계에 개방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통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외교를 잘해야 한다.
“새로운 문물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적극 습득하여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과거의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조차 버리고 바꿀 수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사람과 가정과 나라가 모두 새롭게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영국과 미국과 같이 되도록 힘쓰면 일본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활력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활력이 생겨서 몇 십 년 후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남에게 의존한다면 자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나 하나는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권리를 허용해야 한다.
지금의 지도자들도 생각하지 못할 개방적이고 합리적이며 민주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자유를 향한 이승만의 필생의 투쟁
몇 년 전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민족의 모세 같은 지도자라는 내용의 발표를 한 적이 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모세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자유를 찾아 탈출했지만,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상숭배 등으로 하나님을 거역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40년 간 사막을 방황케 하며 시련을 겪게 했다고 한다.
청년 이승만이 1904년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는 종살이하던 가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은 종문서까지 불태우고 생계를 유지할만한 토지와 금품을 주어 나가서 자유롭게 살라고 내보냈지만, 그들은 10리도 못 가고 되돌아와 계속 종살이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는 내용이다.
그가 이 같은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 것은 종의 근성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근성을 극복하는데 40년 걸렸다는 것과 상통하는 내용이다.
조선왕조 하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전제정치와 양반제도 하에서 자신의 권리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다. 이어서 일본 압제 하에서 자유 없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때문에 자유민으로 살려면 오랜 기간 시련과 교육훈련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이승만은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갈라디아서 5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라는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가 건립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 서 있는 이승만 동상의 기단에 새겨져 있다.
<독립정신>에 쓰여진 이승만의 독립정신의 의미는 각자가 자주·자립정신을 가져야 민족의 독립도 유지할 수 있고 부강한 나라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했고 각자는 무한한 잠재능력을 가졌으며, 그러한 정신을 구현한 것이 민주주의라고 확신했다.
그는 왕족출신이었지만 전제군주제와 양반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100만의 인구를 가진 나라라 하더라도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한다면 한 사람의 능력밖에 발휘하지 못하지만, 100만이 모두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한다면 100만배의 역량을 가진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민주주의가 곧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자유는 이승만 정치철학의 중심개념이었다.
자유를 향한 그의 투쟁은 20대 초 전제군주제를 폐지하고 민주적인 입헌군주제 채택을 비롯한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에 앞장섰다. 목숨을 건 역모죄를 범하여 종신형까지 받았던 것이다.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면서 자유를 위한 그의 투쟁은 독립투쟁이 되었다.
해방 후 자유를 말살하려는 공산주의를 배척하고 자유민주제도에 의한 건국을 했다. 그는 미국에 있을 당시부터 스탈린 치하의 공산사회의 실상과 다수의 동유럽 국가들이 공산화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에게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그의 필생의 꿈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확신과 끈질긴 투쟁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건국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의 주장대로 좌우합작을 통해 신탁통치를 받았거나 김구 선생의 주장처럼 남북협상에 의해 통일정부를 수립했다면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자유에 바탕을 둔 그의 강력한 반공정책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모든 국민에게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는 두 가지 혁명을 했다. 그 하나는 교육혁명이다. 당시의 국가형편으로는 6년제 의무교육을 감당할 수 없었음에도 그는 교육정책에 국방정책 다음으로 많은 예산을 배정하며 교육입국의 정책을 폈다. 그래서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이 폭발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휴전 직후인 1954년 이승만 정부는 전국민 완전 문명퇴치계획을 수립하여 수만 개의 국문보급반을 편성하여 문맹퇴치를 했다. 깨인 국민이 아니고는 결코 자유민이 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문맹률은 80%를 육박했지만 재임 중 10%로 낮추어 선진국 수준에 이르게 했다. 이것은 역사상 전례 없는 교육혁명이었다.
두 번째 혁명은 농지개혁이다. 오랜 세월동안 국민 절대 다수는 소작농 또는 반소작농으로 양반들에게 종속된 삶을 살아왔지만, 농지개혁으로 절대 다수 농민을 경제사회적으로 자유민이 되게 했다. 이것은 오랜 봉건질서를 무너뜨린 경제사회적 혁명이었다.
월남의 패망 원인 중의 하나는 농지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이며, 필리핀이 발전하지 못한 것도 농지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공산침략을 당했을 때 그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전후방을 누비며 절망에 빠져 있는 군대와 국민에게 승리의 확신을 불어넣었다.
맥아더 장군은 의회 연설에서 “전 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만이 모든 위협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운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것은 이 대통령의 영도력 때문입니다.”라고 했고, 로버트슨 국무부차관보는 “이 대통령은 전 국민을 분발시켜 공산주의와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 지도자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라고 칭송했다.
휴전을 앞두고 이 대통령은 나라의 생존과 발전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에 방위조약 체결을 강력히 요구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약소국과는 동맹을 결성한 전례가 없다면서 단호히 거부했지만,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석방 등 휴전반대 투쟁을 통해 끝내 한미동맹을 쟁취했다.
약소국 지도자가 초강대국의 외교정책을 바꾼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한국이 공산화의 위협에서 살아남았을까? 경제발전과 민주발전은 가능했을까?
김일성이 국민총생산의 20~30%를 국방에 투입하고 있는 동안 박 대통령은 한미동맹에 힘입어 5%만을 국방비에 쓰면서 자원을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외국기업이 한국에 투자를 했을까? 한국에 차관을 주었을까? 안보불안 하에서 민주투쟁은 가능했을까?
한미동맹 쟁취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월남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한미 방위조약 체결 20년 후인 1973년 미국은 공산 측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을 철수시켰고 그 후 2년 만에 월남은 공산화되고 말았다.
따라서 한미동맹의 쟁취야 말로 대한민국 최대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MIT와 하버드대학교 교수의 공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에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발전을 한 반면 같은 민족인 북한이 최악의 실패한 국가로 전락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유민주체제와 공산독재체제라는 제도의 차이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이 대통령이 자유라는 나무를 심고 가꾸었고 지켜냈기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대한민국은 이 대통령의 영도 하에 올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어떤 대통령은 60-70%의 지지를 받고 이승만 대통령은 1% 내외에 머물고 있다. 최근에는 노무현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김대중, 박정희 순서로 높게 평가되고 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1% 미만에 불과하다. 소인배들이 영웅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노무현과 김대중 대통령을 어떻게 이승만 대통령과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의원이 백선엽 장군을 민족반역자라 했다. 그가 나라를 팔아먹었는가? 간첩이었는가? 전도된 가치관, 잘못된 판단기준 때문이다.
이성계 장군과 무학대사 간의 유명한 대화가 있다. 부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비유가 우리에게 와 닿는 비유이다.
터키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케말 파샤는 “역사 창조도 중요하지만 역사 해석이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1945년 이후 건국한 100여개의 국가 중에서 선진국 수준에 이른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도 지도자들까지 나서 한국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판친 나라” 또는 부끄러운 역사, 또는 잘못 태어난 나라로 매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을 가치관 혼란에 빠뜨리는 두 가지 역사인식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민족사관이다. 이러한 사관에 빠진 사람들의 민족의식은 지나칠 정도지만 국가의식은 희박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분단된 국가는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건국과 호국, 산업화와 민주화 등 우리의 위대한 성취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민주사관이다. 이러한 사관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는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자신들을 역사의 선을 대변하는 정의로운 세력이고, 그들의 비판의 대상이 된 세력은 악으로 인식된다. 안보를 위해 또는 경제발전을 위해 민주주의 원리가 조금이라도 침해된 것은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이승만과 박정희를 독재자로 매도한다.
미국식 기준으로 보면 이승만, 박정희 같은 지도자가 좋게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건이 다르면 리더십 전략도 달라야 한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선진국 기준을 모든 것이 열악한 나라에 그대로 적용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도 미국이 원하는 대로만 했다면 결코 오늘의 한국이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한국 현대사를 국가건설 사관에 입각하여 해석하고 있다. 과거의 한국과 같이 현대국가의 기본 인프라가 결여되어 있는 나라에 선진국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개발도상국의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국가건설에 얼마나 기여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가건설이란 현대국가의 기본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현대국가의 기본인프라란 안보, 경제, 정치라는 3대 요소로 볼 수 있다. 건국 후 우리나라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미비한 상태였다. 부존자원도, 재정능력도, 인력도 결여되어 있는 나라에서 이 같은 세 가지 막중한 과업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선순위를 설정하여 단계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북한의 위협에 직면한 우리로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안보와 치안질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점에서 각계에 침투한 공산세력을 색출하고, 한미동맹을 쟁취하고, 60만 대군을 육성한 이 대통령의 공로가 지대하다.
이승만 없는 박정희는 없다. 이 대통령이 구축한 안보의 울타리 속에서 박 대통령은 국방비를 최소화하며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고, 이승만 시대에 이루어진 교육받은 산업일꾼과 현대식 조직인 60만 국군이 있었기에 경제개발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 없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은 없다고 본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구축한 안보와 경제의 바탕 위에서 그들이 민주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고, 나아가 북한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지원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이 국가안보, 경제발전, 민주발전의 순서로 단계적으로 달성했기 때문에 어느 나라보다 성공적인 국가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이승만은 가장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지도자였으며, 그렇게 때문에 확고한 민주주의자의 신봉자였다. 전쟁 중에도 선거를 중단하지 않았다. 매주 기자회견을 했다. 국민이 원할 때 스스로 물러났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인이었다. 감옥에서조차 학교를 열고 도서관을 만들고, 영한사전을 편찬했다.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고, 미국 민주주의를 체험으로 습득한 사람이다. 노예근성으로는 민주국민이 못된다면서 교육혁명을 이룩했다. 한국의 MIT로 인하공대를 설립하고 세계로 뻗어나갈 인재육성을 위해 한국외대를 설립했다.
작년 4·19단체가 이 대통령을 비판했을 때 저는 이승만은 민주투쟁세력의 대선배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그 단체의 대표로부터 옳은 지적이라는 회신을 받은 적이 있다. 이승만을 수구 꼴통의 원조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그야말로 우리나라를 송두리째 바꾼, 위대한 국가건설의 지도자라고 확신한다.
풍랑을 만난 밤바다에서 선장의 역할이 중요하듯이 우리 민족의 최대 시련기에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가졌다는 것은 우리나라에 큰 행운이었다. 결코 민족의 영원한 표상인 이승만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국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민족을 자유의 세계로 인도한 한국의 모세였다고 본다. 그러나 북한동포들은 아직도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고통 받고 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가르침에 따라 한 마음으로 뭉쳐 더욱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고 나아가 북한동포를 악의 세계에서 구출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확신한다. 20여일 후로 다가온 대선에서 이승만의 애국충정을 계승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도 우리의 당면 과제라 본다.
 
 
김충남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원)
육군사관학교 교수,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역임
대통령 정무비서관, 공보비서관 역임, 청와대 사정비서관 역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