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6-20 15:11
제16회 이승만포럼- 오영섭 교수, 새로운 역사 진실 발표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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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임통치청원, 안창호가 승인한 것..김규식도 별도 제출
 
 
건국대통령 이승만 ‘죽이기’의 단골 메뉴로 지금도 악용되고 있는 ‘위임통치청원’.
제16회 이승만 포럼(14일 정동교회)에서 오영섭 교수(연세대 이승만연구원)는 그 사건의 진상과 역사적 배경등을 총정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발표했다.

"위임통치청원서는 이승만 단독작품이 아니다. 당시 미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합의에 따라 마련되었고, 국민회 안창호 회장이 중앙총회를 소집하여 논의-승인한 후 승낙서를 정한경에게 공문으로 보냈다. 이에 국제법 전문가인 이승만의 최종 검토 수정을 거쳐 정한경이 윌슨 대통령에게 발송한 것이다."

 

오교수는 미국쪽 ‘위임통치청원’이 1919년 2월25일 우송된 데 이어, 상해 김규식이 3.1운동후인 4월3일에 별도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위임통치청원서가 남아있다고 밝혔다.

안창호 승인-이승만 작성본인 위임통치청원서와 김규식본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며, 김규식본은 <해방을 바라는 한국인들의 요구사항>이란 비망록까지 붙어있다. 두 청원서의 요지는 “한국의 완전독립을 보장한다는 전제하에 한국을 일본 학정에서 해방시켜 일정기간 국제연맹이 통치해 달라“는 것이다.

오교수는 김규식도 상해의 여운형과 협의, 결재를 받지 않고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왜 위임통치청원서를 싸고 이승만에게만 ‘매국노’ 규탄이 이어졌나?
결론부터 말하면 독립운동 세력들의 파벌 싸움, 주도권 쟁탈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위임통치청원 구상은 당시 일본의 잔학한 무단통치 굴레를 벗어나자는 절박한 상황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합의된 시대적 탈출구였다. 더구나 제1차세계대전후 창립된 국제연맹의 도움을 받자는 기대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등은 당시 각국 식민지 피압박민들의 억압된 요구를 폭발시켰던 것이다. 여기에 한국 독립운동가들도 완전독립의 과정으로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안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무엇보다 일본의 학정부터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에 따라 구체화된 위임통치청원은 3.1운동 직전에 완성, 미국정부와 국제연맹에 발송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연합국인 미국과 국제연맹은 모두 이를 무시했다. 임시정부도 없는 비공식단체의 호소는 물거품이었다.
 
위임통치청원에 반기를 든 것은 무장투쟁 주창자인 박용만 신채호, 공산계열 이동휘 등이었다. 3.1운동후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무장투쟁론, 의열투쟁론, 외교독립론 등등의 주도권 싸움이 치열해졌다. “이완용은 있던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신채호의 유명한 매국노 발언도 이때 나왔다. 식민주의 패권시대의 강대국 파워폴리틱스를 알길도 없는 구시대 의병 수준의 민족자존심이라고 할까. 특히 1921년 1월부터 이승만이 상해에서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시작하자 박용만 등 반대세력은 반(反)이승만 운동을 거세게 벌여 나갔다.

“다 지난 일을 가지고 왜들 이러나?” 이것은 초기 안창호가 변명 겸 반대세력을 달래던 말이다.
그후 안창호 역시 라이벌인 이승만 반대 진영에 가담, 모든 책임을 이승만에게 뒤집어 씌웠다.
 
지금은 어떤가? 국내 현대사 학자들은 대부분 무장투쟁론을 일방적으로 중시하고 외교독립론이나 위임통치청원은 이승만의 매국적 행위로 왜곡하여 교육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일제시대 조선공산당을 이은 북한 정권이 선전해온 '이승만=친미 매국노' 등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역사학계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한 연구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오교수는 “일제강점기에 급진적 독립운동가들은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을 매국노라고 비판했지만, 그러나 현대사의 진로는 이승만이 구상하고 내다본 궤적을 밟으며 성장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